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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장 넓은 길

    양광모

    살다 보면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원망하지 말고 기다려라

    눈에 덮였다고
    길이 없어진 것이 아니요
    어둠에 묻혔다고
    길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묵묵히 빗자루를 들고
    눈을 치우다 보면
    새벽과 함께
    길이 나타날 것이다

    가장 넓은 길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다

  •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하여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 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 소망

    나태주

    가을은 하늘을 우러러
    보아야 하는 시절

    거기 네가 있었음 좋겠다

    맑은 웃음 머금은
    네가 있었음 좋겠다.

    시집 “마음이 살짝 기운다” 中